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사코 비 (문단 편집) == [[일본 황실]] 내의 권력다툼에 관여하다 == [[아키히토]] 황태자의 장남인 [[히로노미야 나루히토]] 친왕은 장래 황태자가 되고 천황이 될 인물이라, 자연스레 오래 전부터 그의 결혼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.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천황으로 즉위할 때까지도 좀처럼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, 만 31세 때 미혼인 채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. 당시로서는 상당한 [[노총각]]이었다. 반면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5살이나 어린 남동생 [[후미히토|아야노미야 후미히토]] 친왕은 [[캠퍼스 커플|대학 시절부터 사귀어오던]] 후배인 [[가와시마 키코]]와 1990년에 결혼하여 아키시노노미야(秋篠宮) 가문을 창설하였으며, 이듬해에는 장녀 [[마코 공주]]까지 낳았다. [[노리히토]] 친왕은 [[나루히토]] 황태자의 5촌 당숙이지만 고작 5~6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형제처럼 친했고, 자연스레 히사코 비도 마찬가지였다. 그래서 1990년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나루히토 황태자와 후미히토 친왕의 권력다툼에서도, 노리히토 친왕과 히사코 비는 황태자를 지지했다. 나루히토 황태자가 외교관 [[마사코 황후|오와다 마사코]]를 사모하며 무려 7년간 애태울 때도, 노리히토 친왕은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를 다카마도노미야 궁저로 초청하여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는 등 도움을 주었다. 결국 1993년 6월, 나루히토 황태자는 마사코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. 무사히 결혼하여 안도한 것도 잠시, 당시로서는 [[노처녀]][* 결혼 당시 [[나루히토]] 황태자는 33세, [[마사코 황후|마사코 황태자비]]는 29세.]였던 [[마사코 황후|마사코 황태자비]]는 "하루빨리 장래 황태자가 되고 천황이 될 아들을 낳아야만 한다"는 압박을 받게 된다. 마사코 황태자비가 시집온 지 이듬해인 1994년에, [[후미히토]] 친왕과 [[키코 비]]는 차녀 [[카코 공주]]까지 낳았다. 그러자 히사코 비는 "'''큰며느리인 황태자비가 아직 아기를 낳지 않았는데 작은며느리가 계속 [[임신]]을 하다니, 황실의 서열을 생각하고 행동하길 바랍니다.'''"라고 말했다. 노리히토 친왕 내외는 방계 황족이고, 다른 방계 황족들도 별다른 개입을 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, 노리히토 친왕 내외의 행동은 다소 이례적이라고 볼 수 있다. [[후미히토]] 친왕이 형인 [[나루히토]] 황태자보다 먼저 결혼한 것, 후미히토 친왕과 [[키코 비]]의 좋지 않은 행동들, 그리고 노리히토 친왕 내외의 적극적인 성격 등이, 노리히토 친왕 내외를 나서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. 실제로 후미히토 친왕은 어려서부터 좋지 않은 행실들로 유명했고, 키코 비는 야심가로 소문이 자자했다.[* 두 사람의 일화들에 대해서는 [[후미히토]], [[키코 비]] 항목 참조.] 차녀 [[카코 공주]]를 낳았을 때는, 둘째도 딸이라는 말에 "어떻게 해야 아들을 낳을 수 있나요?"라고 [[산부인과]] [[의사]]에게 물었다고. 하지만 히사코 비가 한소리를 한 데 이어, [[아키히토]] 덴노도 "황태자 내외가 아이를 낳기 전까지, 차남 내외는 아이를 더 가지지 말라"고 하명했다. [[나루히토]] 황태자와 [[마사코 황후|마사코 황태자비]]는 결혼 8년 만인 2001년에야 어렵게 아이를 낳았지만, 아들이 아닌 딸 [[아이코 공주]]였다. 황태자 내외뿐 아니라 [[일본 황실]] 전체를 통틀어도 남자아이라고는 1명도 없었기에 (아이코 공주를 염두에 두고) [[여왕|여성 천황]] 허용론이 한창 대두되었으나, 논의가 한창이던 2006년 초에 [[후미히토]] 친왕과 [[키코 비]]가 셋째 [[임신]]을 발표했고, 같은 해 9월 6일 [[히사히토]] 친왕이 태어났다. 히사히토가 태어난 후로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칭송을 받으며 기세가 등등하여 오만하게 행동했고, [[나루히토]] 황태자를 제치고 [[천황]]직을 넘보기까지 하는 듯했다. 반면 다카마도노미야 일가는 가장 [[노리히토]] 친왕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가세가 많이 기울었고, 히사코 비는 홀로 공무를 하고 세 딸 [[쓰구코 공주]], [[노리코 공주]], [[아야코 공주]]를 교육시켜야 했다. 그러다 [[아키히토]] 덴노가 이례적으로 생전에 퇴위하면서 장남 [[나루히토]] 황태자에게 천황직을 물려주며, 장남에게 힘을 실어주었다. 반면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각종 오만하고 좋지 않은 행실들, 자녀들의 부정입학 문제, 특히 장녀 [[마코 공주/결혼소동|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]]로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. 아야코 공주보다 1살 어린 [[마코 공주]]는 [[국제기독교대학]]에서 [[캠퍼스 커플]]로 만난 [[코무로 케이]]와 2017년에 [[약혼]] 발표 [[기자회견]]을 했는데,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와 코무로 일가의 온갖 문제점들이 드러나는 바람에, 두 사람의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기약없이 미루어졌다. 그런데도 마코 공주는 [[일본 황실]]과 국민들의 뜻을 무시하고 결혼을 고집하고 있어서 비판을 받았고, 사윗감에 대해 제대로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결혼을 허락했던 [[후미히토]] 친왕과 [[키코 비]] 내외도 비판을 받았다. 반면 [[마코 공주]]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준비한 [[아야코 공주]]는 어머니 히사코 비가 사려 깊게 골라준 신랑감과 순조롭게 결혼에 성공하여, 마코 공주 및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와 크게 대조되었다. 본래 [[코무로 케이]]와 마코 공주도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던 2018년 가을에는, 모리야 케이와 아야코 공주의 결혼식만이 치러졌다. 히사코 비 역시 "한 사람의 '청년'으로 하여금 황실이 흔들리고 있는 '현상'에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다"면서 코무로 케이를 비판했는데, 이미 약혼 발표 기자회견 때의 모습에서부터 코무로 케이를 좋지 않게 보았다고 한다. 막내딸 아야코 공주의 결혼식 때 발표한 히사코 비의 소감문을 보면, 히사코 비의 그러한 생각이 잘 담겨 있다. >나는 '''사위 모리야 케이의 부모님이 어떠한 분들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.''' 안사돈 키미에 님은 생전에 국제교류와 해외봉사에 힘썼고, 특히 아동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. 바깥사돈 오사무 님은 해외에서 [[일본]]의 전후 부흥을 위해 노력했습니다. '''따라서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성장했을 모리야 케이'''는 '''올바른 가치관을 지닌 훌륭한 청년'''일 것이라고 확신했고, 그래서 그가 내 딸 아야코와 결혼하는 것을 찬성했습니다.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기쁩니다. 이쯤 되면 이름만 언급하지 않았지, 사실상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를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. 일본 국민들뿐 아니라 [[궁내청]]에서도 이 소감문에 대해 "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 대한 공격 목적이 강하다"고 인정하고 있으며, 일본에서는 "히사코 비가 막내딸 아야코 공주를 성공적으로 결혼시킴으로써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 한 방 먹였다"고 평하고 있다. 어느덧 [[코무로 케이]]와 [[마코 공주]]가 결혼식을 미룬 2020년이 되었지만, 아무것도 진전된 것은 없다. 2020년 1월 즈음에 [[일본 황실]]에서는 [[미야케#s-3]] 회의가 열렸는데, 이 자리에서 히사코 비와 그녀의 손윗동서 [[노부코 비]]는 [[후미히토]] 친왕 내외에게 "현 상황을 해결하라"고 강하게 요구했다고 한다. 2021년 10월 26일, 마코 공주와 [[코무로 케이]]는 [[결혼식]]도 [[지참금]]도 없이 [[혼인신고]]만 하여 정식 [[부부]]가 되었다. 평민이 된 [[코무로 마코]]는 남편 케이와 함께 11월 14일 [[미국]]으로 출국하여 [[뉴욕]] [[맨해튼]]에 신접살림을 차렸다. [[분류:일본의 친왕비]][[분류:1953년 출생]][[분류:미나토구(도쿄) 출신 인물]][[분류:성심학교 출신]][[분류: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/거튼 컬리지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